'백 년의 고독'을 읽고 쓴 글


보다/현실/고독/연결

 

- 백 년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본다는 것과 현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주로 바라봄으로써 형성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때로 현실을 ‘직시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의 ‘직시(直視)’라는 말은 ‘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한 개인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모습 또한 달라진다. ,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실제로는 천 개의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나의 ‘현실’이 곧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현실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 괴리는 환상이나 착각의 영역으로 추방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인식한 것이 다른 사람이 인식한 것과 같지 않음에도 나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인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현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들은 현실의 이런 다차원적인 측면을 수용하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하였고, 그 결과 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효과를 얻으면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장르를 창조하게 되었다. 이런 효과는 보는 것기억의 형태를 통해 달성된다.

 

쁘루덴시오 아길라르는 호세 아르까디오에게 농담 한번 잘못 건넸다가 그의 창에 목이 뚫려 죽은 자다. 특이하게도 쁘루덴시오는 나중에 자기를 기억해주는 자들이 그리워 그들을 찾아 머나먼 길을 오게 된다고 소설에 쓰여 있다. 그는 우르술라와 호세 아르까디오 주변을 배회하면서 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고, 함께 늙어간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죽은 자는 진정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소멸될 때 비로소 진정한 죽음, ‘두번째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쁘루덴시오는 우르술라와 호세 아르까디오 이외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르술라와 호세 아르까디오 이외의 식구들은 쁘루덴시오를 ‘보지 못한다.’쁘루덴시오와 우르술라, 호세 아르까디오는 ‘기억’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이룬 셈이다. 그 세계 밖의 사람들은 쁘루덴시오를 보지 못한다.

 

비슷한 현상이 멜키아데스의 방, 일명 <요강방>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집안의 정신적인 삶이 맴돌았던, 굳게 닫힌 그 방은 그때부터 <요강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그 이름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나머지 집안 가족들이 멜키아데스의 방은 먼지가 쌓이지도 않고 파손된 곳도 없을 거라며 계속해서 신기해하고 있던 반면에, 그 방이 이미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p.89-90)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만이 느끼지 못했던 방 안 공기는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유년 시절에 보았던 것과 똑같이 깨끗하고, 똑같이 투명하고, 똑같이 먼지도 없고, 신선도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중략]...

「방엔 적어도 백 년 동안 아무도 안 산 게 확실해. 뱀들까지 있겠던 걸」장교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pp.160-161)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의 모습과 아우렐리아노 대령, 그리고 장교에게 보이는 방의 모습은 다르다. 멜키아데스의 방을 쓰레기장으로 본 사람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정신적 연결고리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아우렐리아노 대령도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유년 시절 멜키아데스와의 유대적 연결을 망각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백 년의 고독』속에서 보인다는 것은 기억, 또는 유대적 연결의 징표이다.

이런 기억이나 유기적 연결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떠올리며 그리워할 때, 그 사람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백 년의 고독』에서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으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기억이나 인식은- 인간들의 개성이 존재하는 만큼- 공유되기 어렵다. 인간이 고독한 이유도 (이 이외에도 다른 원인이 많지만) 거기에 있다. 자기가 아는 현실과 타인이 인식한 현실이 상반될 때, 사람은 이질감을 느끼며 움츠러든다. 갈수록 바뀌어가는 현실을 더 이상 전쟁이나 투쟁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은둔에서, 바나나 농장에서의 학살을 보고 홀로 살아남은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가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한 채 멜키아데스의 방에 칩거하는 것에서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100년 동안 고독했던 것이다.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조금 뒤늦게,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 것은 그들의 핏줄에 흐르는 정신적 유대를 뒤늦게 깨닫는 것과 같다.


  이 소설에서는 이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이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우리의 고독은우리의 백 년은아직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겪고, 보고 또 기억한다. 그 침전물들이 우리의 현실을 이룬다. 그 현실의 개별성이 우리를 고독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기억의 파편들은 섬처럼 떠 있는 개인들을 이따금씩 엮어줄 수 있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되기도 하며, 공감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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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ée | 2008/05/28 21:59 | writing room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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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Fernweh at 2008/05/29 11:59
Goood.

흐음, 어떤 책을 '너무 일찍' 읽는 것도 안 좋은 것 같아. 지금 나이에 처음 읽었더라면 참 좋았을 책인 것 같은데 말이지.
Commented by Josée at 2008/05/30 01:05
감사합니다. :)

일찍 읽어치운 책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죠.

이 책은, 그래도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아서 좋았어요. 묘하게 재밌어.
Commented by 뼈긁는좀비 at 2008/06/02 19:24
와, 이전에 읽었던 감상문과는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시는 군요. 즐겁게 잘 읽었어요'ㅁ'!
Commented by Josée at 2008/06/05 00:44
감사합니다 ^-^ 처음뵙네요~ 반갑습니다
Commented by 조영환 at 2008/06/08 00:28
아 내가 요즘 존나 혼란스러운게, 머냐하면, Reinaldo Arenas라고 쿠바 문학가가 있는데,

그 사람 자서전을 읽었어. 근데 이 사람이 60년대 쿠바혁명 당시에 카스트로 정권하에서

심한 핍박을 받은 문학가 중에 한명이야. 왜냐하면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근데 자서전에서 마르퀘즈는 권력에 빌붙어서 독재정권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자로 묘사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부분이 내 기억이 맞다면 세번이나 나와. 그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까지도 깎아내리기도 하는..마르퀘즈보다 훨씬 뛰어난 남미작가들이 있음에도 그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이걸 읽고 나는 오래전부터 고민만하고 결론을 못내린 문제 - 예술가의 평가에 있어서 예술 외적인,

그러니까 개인사라든지 이 경우 정치적 입장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 에

다시 직면하게됐어.


마르퀘즈의 문학가적 측면에 대한 평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 사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처지는 못되..작품을 모두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여하튼 -

카스트로 정권에 영합하면서, 다른 문학가들이 탄압 - 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부정되는 것은 물론, 투옥 사형까지도 이루어지는 - 받는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시민 - 일반시민이 아닌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으로서의 마르퀘즈는 재평가받아야 할 필요성

이있는 것은 아닌가..라는게 일단 잠정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이야.

이건 솔직히 말해서 내가 Reinldo Arenas를 더 지지하고 있기때문이겠지..

무슨 이성적판단 이런거에 의함이 아니라..


근데 조금 일반화시켜보면, 만약에 정미경이나 박상륭, 한강처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

- 뿐만아니라 일일이 이름대기도 힘든 수많은 음악가들-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외적인 측면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면, -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대운하를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든지 - 나는 과연 얼마

나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야. 나는 뭐 엄정하고 중도적이고 이런 사람도 못되니까 당

연히 그 사람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겠지만..항상 평가의 준거는 마련되어있어야하지 않나 라는 생

각에 괜히 고민만 하고 있어.


이거 무슨 보물상자 찾은거 같은 느낌 ㅋㅋ니 블로그 자주 오겠다.

나도 심적으로 여유가 좀 생기면 블로그 진짜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음..
Commented by Josée at 2008/06/08 10:46
너 글 한번 쓸 때 이렇게 쓰며는, 블로그 써도 되겠다 얌-
담에 봄 그 자서전 빌려줄 수 있어?

내 생각으로는, 문학과 사상의 거리가 음악 기타 예술과 사상의 거리보다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어렵지 않나 싶어. (물론 그 반유태주의 작곡가 (갑자기 이름생각안나 -_-)의 문제도 있긴 하지만) 한 사람을 좋아할 때 100% 좋아할 수 없듯, 결국 문제되는 건 그런 부분을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된 게 아닐까 싶담... (나도 잘 몰라 생각 많이 안 해봤어 ㅋㅋ)

모든 예술가들에게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의식'이란 부담을 지워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르께스는 정치 활동도 활발했으니, ... 그리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발언이 가지는 의미도 있으니, 나도 그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Commented by 조영환 at 2008/06/11 15:03
지금 보니까 댓글 두서없이 흥분해서 막 썼네...사실 저 때 좀 들뜨긴했음.
아 드디어 내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구나 라면서..
자서전 제목은 Before Night Falls.
내가 한 달쯤 전에 이 책 구하려고 대형서점 다 돌아다녔는데
데이터베이스에만 있고 재고는 없더라.
개인적으로 해외주문하던지 해야된다그래서..나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어.
같은 제목으로 영화도 있는데

주인공은 Javier Bardem.....

이제 내가 필요이상으로 주절거린 이유를 알겠지 ㅎㅎ 아 진짜 미쳤어 하비에르는..
연기가 가지는 호소력이라는게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액터라고 생각함.

본문 다시 읽고보니까,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소멸될 때 비로소 진정한 죽음, ‘두번째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에 깊게 와 닿는데, 이유인즉슨

2003년(아마..맞을듯)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인 "바다와 나비"가 떠올랐기 때문.

거기서 중요한 모티프중에 하나가 '타인의 죽음'에 관한 것인데,

.....아 이거 제대로 전달해주고 싶은데

지금 학교에서 공부하다 지겨워서 컴퓨터실에서 시간때우는 중...이라 글이 산만해질 것 같음.

나중에 생각 똑바로 정리해서 써야겠다. 바다와 나비 읽어봤나염 ㅎㅎ
Commented by Josée at 2008/06/12 00:44
오 그래 Javier Bardem은 신들린 연기를 하고 계시지.ㅋ 무서워.
나 코엔 형제 영화도 무서워서 아직 못 보고 있다는...;;; 좀 보고 싶긴 한데-

나 어렸을 때 '백년의 고독' 읽을 때도 저 '두번째 죽음' 개념이 너무 인상깊었어... 공감했었거든.
Before Night Falls와 바다와 나비. ok 읽을 책이 더 생겼군.ㅋ 님의 음악과 문학에의 깊은 조예는 항상 멋있으심. 다음에 이야기 나눌 때 그 얘기('두번째 죽음'과 '바다와 나비') 해줘- 기대하겠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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